2025년 내 삶에 대하여

12월 31일. 내 삶의 황금같은 한 해가 저물어간다. 이번해를 한 가지 감정으로 설명하자면 행복감이다. 나단이와 나엘이가 빛과 같은 한 해를 선물해주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웃으며 보낼 수 있는 것은 나다나엘과 보냈던 황금같은 시간 때문이다. 나단이와 나엘이는 일년간 눈에 띄게 성장했다. 두 돌이 갓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기적으로 자신의 필요를 말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유롭게 말을 구사하고 아빠의 마음을 살펴준다. 얼마전 아빠의 약간은 우울한 듯한 표정을 본 나엘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빠에게 와서 조용히 껴안고 “아빠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고 돌아간다. 나단이도 그 어린 나이에 이미 남자아이의 퉁명스러움을 가졌지만 사이사이 “아빠 사랑해"라고 고백해온다. 이 아이들을 위해 내 인생을 다 소비해도 아깝지 않다는 마음이 한없이 든다.

25년의 초반에는 정치적 불안정이 나에게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 계엄이라는 엄혹한 단어가 초래한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한켠에 내 삶의 6개월쯤을 자리하고 있었다. 펜이 손에 잡히지 않고 논문이 읽히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논문을 쓰기 시작해서 한달만에 두 논문의 글쓰기를 끝냈으니 그 영향은 확실했던 것 같다. 8월 초 두개의 논문을 끝낸 후 8월 한달간 새로운 연구를 의욕적으로 했고 논문을 쓰기 시작해 10월에 끝마쳤다. 물론 너무 의욕적이고 공격적이었던 논문이었던지라 공저자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지금 전반적으로 뜯어고쳐야할 상황이지만 한 단계를 끝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이후 내 생각을 포기하지 못하겠어서 접어놓고 있으나 26년 초반에 논문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25년 초반부터 종반까지 충남대학교의 인력양성사업이, 25년 하반기에는 UST의 수업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공부라는 것이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하더니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책 한권을 열심히 읽고 흡수해서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거기서 공부한 것들을 가지고 2학기 논문작업에 써먹기도 했으니 긍정적이다. 다만 충남대학교의 인력양성사업은 1년으로 진행하다보니 내 자신도, 학생들도 다 지쳐 막판에는 거의 등떠밀려 최종보고서를 써낸 느낌이다. 23년도에 했던 것에서 진전이 아니라 제자리를 맴돌다보니 내 자신이 흥미가 떨어졌다. 다행히 이번학기로 인력양성사업이 끝났지만 혹시 또다시 비슷한 일을 해야한다면 그 때는 주제를 바꿔 분광기가 아니라 전파망원경이나 전자회로를 만드는 수업을 진행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이번해에는 많은 도전을 했다. 현재 위치에서 나의 역할이 없으니 다른 역할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해서 여기저기 노력을 했다. 지난 몇년간 분명 난 매우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남아있는 결과물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실패를 경험한다. 실패에 난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본 실패는 내가 이미 극복해서 내 안엔 없다고 생각했던 열등감과 패배감을 다시 끄집어내 주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희망이 없어짐도 보인다. 사람의 지적 능력이 40-45세에 최대라는데 난 이미 이 나이를 지나가고 있다. 연구소는 나에게 큰 연구의 일부가 되라 강요한다. 난 자그마한 내 연구를 하고 싶은데 연구원은 나와 결이 맞지 않는 것 같다. 나에게 가진 것이 좋다며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누구도 설득되지 않고, 내 자신이 틀렸을까 다시 돌아보게 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냥 이 자리에 머무르게 될 확률이 점점 많아지는데, 그저 조용히 논문만 쓰며 작은 장비들을 만들며 살아가도 행복할까. 이 기관은 나를 그렇게 살게 허락해줄까. 그리고 그 삶에서 난 내 마음의 욕망을 억누르고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열등감에서 초래된 나만 옳다는 꼰대같은 마음없이 내 내면이 은퇴까지 건강하게 성장해갈 수 있을까.

26년은 좀 더 행복하고 싶다. 내 만족을 종교적인 성취나 아이로부터 찾고 싶지 않고, 남의 인정으로부터 찾고 싶지 않다. 유지 가능한 만족과 행복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 어떻게 해야할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항상 앞의 목표를 놓고 달렸던 삶인지라 이러한 목표 없이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제 내 삶에서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살피며 살아야할 때가 되어오는 것 같다.

삼류 과학자의 다짐

어릴적 나의 꿈은 훌륭한 과학자였다. 훌륭하다는 건 첫째가 되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내거나 주도하는 과학자라는 표현일 것이다. 대학교에 들어가면서는 ‘내가 많은 사람들이 틀렸다는 걸 깨우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었고 (그때는 뭐가 그리 내가 대단해보였는지 비과학적인 사고로 바라본 과학의 세상이 잘못되어 보였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조금은 겸손하게 ‘두 개의 논문만 끝내겠다’는 작은 다짐을 했지만 그 이면에 훌륭한 과학자가 되겠다는 욕심이 꿈틀대고 있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에는 노골적으로 ‘난 일년에 논문을 몇 편씩 써서 존경받는 과학자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 놓여진 작은 문제에 침잠(沈潛)하는 것이, 아인슈타인과 파인만 같은 훌륭한 과학자를 꿈꿨던 어릴적 꿈과 비교해 보잘것 없어진 현실이 부끄럽다 느낀다. 학회에서도 거대한 질문, 우리 분야의 중요 난제들 – 코로나 히팅과 같은 – 을 맞닥뜨리지 않는 것이 마음 한켠을 누르는 돌덩이 같다. 프리먼 다이슨이 글 중에 “노년의 아인슈타인이나 노년의 힐베르트 같은 환원주의적 사고로 학문을 접근하던 이들은 큰 수학적 성취를 이용한 현상에 대한 연구는 – 비록 그 연구가 현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이슈인 블랙홀이라고 할지라도 – 삼류 과학자의 일"이라 여긴다고 언급한다. 근데 어찌보면 그 천재적인 사람들만이 아니라 서울대에서 학문을 접해온 나에게도 내면화되어 있다. 프리먼 다이슨도 시대의 과학자로 살다간 사람이지만 그와 함께했던 파인만, 오펜하이머를 보며 마음 힘들어하는 젊은 시절들도 있었으니 이러한 철학적 고찰을 하지 않았을까.

나의 ‘태양 코로나 먼지의 편광’에 대한 연구와 ‘채층의 제트와 충격파’에 대한 연구는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논하기 어려울지 모르는 매우 지엽적인 연구다. 하지만 언젠가 가졌던 생각처럼 과학을 하는 마음은 꽃을 보며 ‘아름답다’ 느끼는 마음과 비슷한 듯 하다. 학문적인 추구는 초월적 아름다움을 찾는 예술가로서의 목표와 동일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논문은 잘 쓰지 못해도, 과제 프로포절을 쓰며 이 연구를 “왜” 해야하는지 답변하기 어려워도, 자연의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내 연구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당신의 연구가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받게 될 때 우주의 역사와 생명의 기원, 인류의 존망에 걸린 문제와 연계하려 힘쓰기보다 그저 ‘나약한 인간으로써 자연의 초월적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의 가치’에 대해 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4년 11월 18일 (월) 1차 수정 2024년 11월 21일 (목) 퇴고

건강하게만 커다오!

어제와 그제 이틀간 아빠는 나단이와 오랜만에 둘이서 잤어. 나단이는 그 사이 (외할머니와 친할머니가 봐주시던)에 많이 컸더구나. 자면서도 웽 울긴 하지만 금방 그치고, 다독이면 다시자더라. 이제는 6시간씩 두번 길게 자는게 익숙하더라구. 아빠가 나단이를 전담하던 3월 초까지만 해도 3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보채고 울었었는데 정말 많이 바뀌었어. 게다가 어제 아빠 품에 안겨서 아빠를 씨익 보며 웃어줄 때는 아빠가 녹아내려버렸어.

어젯밤 아빠는 나단이와 자면서 ‘나단이가 사실을 말을 할 줄 아는거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였어. 나단이가 하도 얼굴을 긁어놓아서 나단이 손에 양말을 씌워 놓았는데 양 손을 맞대서 잡아 빼려고 하다가 안되니까 입에 갖다 넣더라구. 그래서 아빠는 “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네!“라고 생각하며 너무나 놀랐지. 물론 잠시 후에 안 사실이지만 나단이는 그냥 손을 부딪히다가 손을 빨아먹고 싶은거였더라구. 뭐, 그건 그랬어도 어제 나단이는 정말 착하고 어른스럽게 잠잤어.

엄마도 계속해서 “이 순간이 지금뿐이야"라며 아쉬워하고 있어. 아빠도 마찬가지야. 이 순간이 지금뿐이야. 곧 날이 지나고 해가 지나면 나단이와 나엘이는 점점 크면서… 커도 귀엽겠지? 지금이 생각나지 않을만큼 귀여울거야. 사춘기 때 조금 힘들 순 있지만 그래도 귀여울 거고, 대학을 가서도 귀여울거고, 결혼해도 귀여울거고, 아이들을 낳게 되면 또 귀여울거야. 아빠와 엄마는 항상 행복하겠다!

나단아 나엘아, 무럭무럭 쑥쑥 자라주렴. 건강하게만 커다오!

2023-04-17 깊어진 밤중에.

딥마인딩은 사이언스인가?

딥마인딩은 사이언스인가?

알파고는 바둑을 제패한 후 더 성장해서 알파스타로 개명하고 스타크래프트를 열심히 했지만 인간을 쉽게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물론 컴퓨터의 능력으로 모든 영역을 보면 쉽게 이기지만 인간과 동일하게 보는 영역이 한정되어있는 경우 패배를 했다고 한다. 이세돌 선수가 알파고에게 패배하면서 전국민이 가졌던 충격은 아마, 엄청났던 것 같다. 한국인이 한국에서 패배했으니 어느나라보다 더 크지 않았을까?

이틀전 연구소에서 딥마인딩을 통한 사이언스를 수행하고 Nature Astronomy에 논문을 발표하신 교수님이 발표를 하셨다. 이전에도 몇번 발표를 보아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내용은 아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보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다. 딥 마인딩은 사이언스인가? 내 이해로 딥마인딩은, 현상 분석을 잘 하는 친구가 옆에 있는 것과 같다. 딥마인딩이라는 친구는 이전 만개의 데이터를 보여주면 만 한번째에 어떤 것이 나올지 알려준다. 놀라울 정도로 대부분은 맞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 이면에 물리 현상이나 어떤 이유인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우리가 이전에 수행하던 시뮬레이션은 수식을 가지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를 보여준다. 물론 인간의 한계 이면의 계산들이기 때문에, 두뇌로는 따라갈 수 없는 계산들이기 때문에 거시적인 형태만을 보고, 유추할 뿐 아니라 갖가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파라메터들을 적절히 배합해서 사용한다. 가령 태양의 특정 지역 플라즈마의 점성이 얼마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 값을 어떻게 넣느냐에 따라서 태양 폭발과 연관된 자기재연결 현상이 일어나느냐 마느냐, 그 강도가 어떻게 되느냐가 결정된다. 논리적인 점성을 가정하고 그 값을 계산해서 실제 자연현상과 비슷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수치해석, 시뮬레이션이다.

어 시뮬레이션조차 믿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들이 많다. 학회장에서 시뮬레이션을 하는 학자들을 만나면 항상 수식을 사용하는 학자들이기 때문에 관측에 집중하는 학자들보다 대부분 현상에 대한 물리적인 이해가 상당히 뛰어나고 논리적인 설명을 곁들인다. 하지만 시뮬레이션 데이터에 대한 해석은 결국,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물리값을 직접 볼 수 있는 데이터에 대한 해석이다. 그런데 그 데이터는 적절한 가정의 초기값이 조합되어 계산된 결과다.

시뮬레이션 결과들을 보면 분명 인간의 직관과 수학적 사고를 따라 움직이는 결과를 보여주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마, 계산을 계획한 과학자들이 그런 결과만을 끄집어 냈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직관과 차이가 있는, 의도와 다른 결과가 시뮬레이션에서 나왔을 때 대부분의 경우는 초기값을 수정한다. 그 결과는 결국, 인간의 수학적 이해도와 일치하는 결과를 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시뮬레이션과 해석이 실제 우리 이해의 진보에 어떤 도움을 줄까?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물리적 값조차 주지 못하는 딥마인딩은 실제로 과학의 중심 툴이 될 수 있을까? 내 생각엔 부정적이다. 일부 분야에서는 사용하겠지만 보조적인 역할로밖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보통 과학은 특이성에 기반한 이벤트를 관측함으로써 발전하는데 이러한 특이 상황을 찾아내는데 딥마인딩이 사용 가능할지 모른다. 예보 등에 사용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순수과학의 전면에 등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컴퓨터는 새로운 창조를 할 수는 없을테니까.

AI기술과 일자리

인간을 공격할 것인가?

인간성이란 무엇일까?

발표의 호흡

외부 발표나 강연에서 지금까지 오래 발표해 온 연구관련 내용을 발표할 때는 부담없이 이전 슬라이드와 스토리, 새로 추가한 연구를 짜깁기하여 새 슬라이드를 만든다. 가끔 완전히 새로운 주제에 대해 발표해야할때는 발표 형식부터 호흡과 스토리의 진행 등을 면밀히 검토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보통은 내 능력 이상의 내용을 발표하려니 공부가 필요하다. 가끔 유튜브를 뒤지며 같은 주제에 다른 연구자들은 어떻게 발표하는지 들어보고 이를 참고해서 슬라이드도 만들고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유튜브에서 발표자가 너무 잘 알고 강의도 너무 잘하면 과연 내 발표가 필요한가란 자괴감이 든다. 내가 발표를 가는 것보다 ‘이 강의를 보세요! 엄청 똑똑한 사람이 여러분을 이해시킬 거예요!‘하고 링크를 던져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하여간 나에게 자문료를 주기에 돈에 끌려 아무 말 없이 그 유튜브 관련 논문을 참고문헌에 추가하며 발표자료를 만들어 나간다. 유튜브가 넘쳐나는 시대에 대면 발표나 강연이 왜 필요할까? 발표 자리에 앉아있으면 졸리고, 전후로 이동, 준비 등으로 소비되는 시간도 많고, 혹시 발표자가 어눌하거나 말이 느리거나 빠르면 1.5배속 재생도 안되고 중간에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재생/정지가 되지 않는 불편함을 감수 해야한다. 과거에는 이러한 강연이나 발표가 아니면 발표자의 전체 내용을 시청각으로 따라가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유튜브는 이제 발표장에 앉아있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 이 첨단화된 시대에 대면 강연은 왜 필요할까? 혼자서도 설득 안되는 이 지점을 곰곰히 앉아 생각한 후의 내 결론은, “대화의 여백"이다. 발표자는 청자와 호흡을 나눈다. 청자가 발표자의 생각의 흐름을 현장에서 따라가는 것은 친구를 직접 만나는 것과 페이스타임으로 만나는 것의 차이와 같지 않을까. 강연을 듣는다는건 서로 이해의 깊이를 높이고 서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일 수 있다.

그렇기에 발표는 정보의 전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호흡을 나누는데 집중해야 한다. 발표 중의 호흡을 가다듬어 준비해야하며 현장에서 청자의 호흡에 나의 호흡을 맞추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 발표자의 호흡이 청자의 호흡보다 빠르면 청자는 이야기를 놓치고 좌충우돌하다가 결국에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걸 포기한다. 만약 발표자의 호흡이 느리다면 청자는 지루해하고 졸리게 된다. 청자의 호흡은 발표자가 전달하는 이야기의 강약에 따라, 발표의 흥미도에 따라 빨라졌다 느려졌다를 반복한다. 발표자는 이 호흡의 강도를 배분해야하며 발표 중에도 청자의 호흡을 바꾸도록 유도하거나 자신의 호흡을 청자의 호흡에 맞춰가며 이야기를 끌어나가야 한다.

나는 내 발표를 하다가 가끔, 내 호흡이 청자의 호흡보다 많이 빨라지는 경우가 있다. 그 상태를 알아차리기까지 보통 몇 문단의 말이 오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청자는 이 사이의 이야기를 놓치거나 그저 흘리게 되며 그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내 호흡을 가다듬고 진행하거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놓쳤다 싶으면 다시 앞으로 더듬어가 짧게 요약해주고 넘어가기도 한다. 발표의 흐름이 깨지긴 하지만 다시 청자를 다독여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혹 발표 내내 이와같은 고민 없이 앞으로만 달려나가는 발표를 한 후에는 보통 청자는 웃고 있으나 마음은 나의 잡다하고 수많은 말 중에 정말 중요한 정보의 말만 골라담느라 골머리를 썩고 있다. 십수분의 발표가 끝나고 나면 청자는 아직 처리되지 못한 정보를 처리하느라 내게 적절한 질문을 하지 못하고 그나마 이해한 거시적인 아젠다에 대해서 묻거나 아니면 이해를 포기하고 조용히 다음 발표로 넘기게 된다.

그러므로 발표전엔 내 호흡을 가다듬어야한다. ‘청자의 호흡을 듣겠다’는 마음가짐을 다시 해야한다. 그리고 중간중간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해하고 계신가요?’ 혹은 ‘잘 따라오고 계세요?‘와 같이 청자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서로의 호흡을 맞춰볼 수도 있다. 발표 중의 청자의 질문은 서로의 호흡을 체크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기회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에서 답변을 정리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야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자세한 답변은 이야기가 끊기지 않게 보통 말미에 덧붙이거나 발표 후 따로 질문자와 논의하면 좋다.

유튜브가 하지 못하는 건 청자의 호흡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Zoom도 제한적이나마 표정으로 그 호흡을 볼 순 있지만 호흡을 느끼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대면 발표와 강연이야말로 발표자와 청자의 진지한 만남이 가능하다. 그 호흡을 나눌 때 개인간 전달되는 지식의 양이 증대될 수 있다.

2025년 6월 17일

꿈같은 아이들

“띵!” 스마트폰 화면이 밝아지며 어머니께서 보내신 우리 나다나엘 사진이 뜬다. 우리 쌍둥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해맑게 웃으며 옥수수를 먹고 있다. 며칠전서부터는 더더욱 나다나엘을 보면 더 애틋해지고 인생의 행복만이 가득하다는 느낌과 이 행복이 깨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띵!” 또 다른 사진이 올라온다. 나엘이가 펑펑 울고 있는 모습. 나엘이가 어떤이유에서든 눈물을 보이면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든 가서 손잡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마음 한가득 이 아이들이 들어차 있다.

내 글은 나이가 완성할까

“홍OO “尹, 이재명 나라에서 살아봐”…게시글 돌연 삭제”

아침 출근 후 여느때와 다르지 않게 포털을 열고 이 자극적인 제목의 글을 마주쳤다. 안그래도 최근의 뉴스기사글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더라’, ‘경선에서 떨어진 후 화가나서 해외로 출국했다더라’, ‘전 대구시장이 서울 자연인으로 돌아간다더라’ 등 전 경선 후보를 인간의 근본적인 ‘욕심’이 드러나는 한 인간으로 폄하하고 놀리는데 집중하는 뉴스기사들이 쏟아져나왔었다. 특히나 요즘처럼 하수상한 때는 더 많은 유명인, 정치인이 글을 썼다가 지우며 뉴스기사에 오르내리는 것 같다.

‘아, 일흔이 넘었음에도 혈기에 글을 쓰면 후회하는 글이 되는구나. 나이가 인간을 완성하지 않는구나’

내 머릿속에서 맴돈 생각과 함께 두세달 쯤 전에 쓴 페북의 글이 떠올랐다. ‘더이상 공개된 장소에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다짐을 깨고 쓴 글이었기 때문이다. 혈기에 가득차서 그 글을 쓰고, 쓰면서도 ‘나중엔 후회할 수도 있겠다’란 생각을 가졌다. 후회하는 감정이 와도 지우지 않겠다는 마음의 투쟁을 하며 글을 이어나갔다. 내 일부 개신교의 독재와 계엄에 대한 찬양을 비난하는 글은 전체공개를 했음에도 고작 20건 정도의 좋아요를 받았을 뿐이지만 내 감정을 표출할 방법이 그 뿐이었고 지우지 않겠다는 감정은 사회 시스템적인 ‘자기검열’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글을 쓴 후 몇시간 후 부터 페이스북은 접속하지 않음에도 마음 깊숙이서부터 부끄러운 감정이 올라왔다. ‘이 글도 내 의가 아닐까…’

자신의 의견을 담은 글쓰기는 내 자신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면 내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글쓰기처럼 보인다. 일흔까지 살아서도 과거의 글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지운다는 건, 먼 과거의 글까지 생각하며 지운다는 건 그 글을 깊이 ‘묵상’하며 마음 무겁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니 오히려 낫다고 할 수 있으려나. 난 언제쯤 마음 가볍게 글을 쓸 수 있을까. 난 일흔이 되면 내 글을 부끄럽지 않게 바라볼 수 있을까. 내 글은 나이가 완성할까.

다만 남는 것은

다만 남는 것은

금요일 저녁마다 순모임을 참석해서 성경을 읽고 일주일을 나누는 자리를 갖는다. 순이란 용어가 어색하지만 과거 교회에서 구역예배에 좀 더 예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일주일을 나누고 좋았던 점, 어려웠던 점 등을 나누고 서로 기도를 해준다.

개중 가장 중요한 이슈는 뭐라해도 자녀 양육이다. 아이를 학원을 보내야하는지, 얼마나 교육 시키는게 올바른지,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가 어떠한지 등 순원들의 대부분의 이슈는 아이 양육이다. 또한 한 나이가 많으신 순원님께서는 자녀의 결혼과 그 후의 자녀, 그리고 그 배우자와의 관계를 이야기하신다. 지난달 버지니아 한 계회의 순모임에 참석해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 아이를 얼마나 교육시켜야 하는지, 경쟁에서 뒤쳐질까봐 부모로서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주일 축구 경기 등이 있으면 예배를 빠지고 가는게 올바른지를 나눴다. 국경을 초월해서 가장 큰 갈등의 장이, 그리고 기도의 주제가 자녀양육이었다. 성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으니 그 주제가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전 학교에서의 기도모임에서 사람들이 성적이나 연구 때문에 기도제목을 내어놓거나 혹은 어려움을 토로할 때, 신앙이 흔들거릴 때 난 너무나도 쉽게 ‘그 시험을 통해 성장시키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끔은 그 말을 입밖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정말 고통 속에 있기 전까지는 이 말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인 신앙강요인지 몰랐다. 고통 속에 있을 때의 부르짖음은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무거운 소리다. 욥이 부르짖을 때 그 친구들의 조언이 논리적으로는 납득되지만 결국 하나님이 올바르지 않다 하시는 건 그 조언이 욥에게 어떠한 도움이 되지도, 위로가 되지도 못하기 때문 아닐까.

요즈음 난 마음 속에 큰 돌덩이를 이고 사는 느낌이다. 부모님과의 관계 정의에 있어 갈등과 어려움이 있어서다. 아무리 이 기도제목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고 한들, 이미 그 통로를 지나오신 분들이라 할지라도 정말 ‘조언’을 할 수 있을까. 삶을 마주서야하느것은 내 자신이고 나의 짐은 조금도 경감되지 않는걸. 심지어 아내마저도 이 마음의 짐을 나눌 수 없어 보인다.

다만 남는 것은 함께 눈물흘려주는 것이다. 순모임에서 순원들이 어려움을 토로할 때 함께 공감하고 기도하며 위로해주는 것이 우리가 타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욥의 친구들이 욥 옆에 와서 어깨를 붙잡고 함께 울며 기도했다면 하나님은 선하다고 판단하지 않으셨을까. 바울이 갇혈을 때 오네시모를 칭찬하고 마가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그들이 옆에와서 함께 먹고 마시며 삶의 힘든 여정을 가는 바울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난 순모임에서 최대한 말을 안하기로 다짐했다.내가 말함이 타인에게 덕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것이 아닌 나의 생각과 주장들로 채워질 수 있기에 차라리 잠잠하고 공감하기로 다짐했다. 혹여 아주 작은 말을 할 때에, 나의 과거 경험조차도 내 주관이 반영될 수 있기에 ‘저만 그랬을 수 있지만,’이라던가 ‘상황이 다를 수 있지만’, 혹은 ‘~인 것 같아요’와 같이 부드러운 용어로 말하기로 다짐했다.

분노

내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옳지 않다 여겨져 숨겨진 곳에 글을 쓰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 아무도 찾지않는 개인 페이지에 내 글을 쓰며 분노를 적어내려가고, 내 자신의 일들을 회개하고 반성하며 기도한다. 그간 크리스챤의 정치적 발언이 올바른가에 대해서 한참을 고민했다. 민주주의 사회는 개인의 신념을 나누고 토론하며 앞으로 가는 시스템인데 과연 교회 성도들에게 ‘잠잠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대변"하는 목사의 신념을 따르라는 왕정 시스템 같은 모습이 올바른가란 질문이었다(1). 특히 지난 몇년간 섬겼던 대형 교회에서 갑자기 차별금지법(2)을 들먹이며 내란 세력에 동조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 특히 최근엔 더 노골화된 것에 내가 그냥 이렇게 조용히 있는게 맞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다행히 내가 생각했던 7년간의 그 교회 생활이 끝나고 작고 더 말씀만에 집중하는 교회로 옮겨올 수 있어서 마음이 평안해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한 마디를 외치지 않으면, 이건 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를 눈감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작정하고 글을 써내려 간다.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윤석열과 김건희라는 무속의 사람들을 지지하는, 그리고 그들이 자행한 군사 쿠테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절대 크리스챤일 수가 없다. 하나님은 낮은 곳으로 임하셨고 약자를 섬기고 보듬었는데 지금 저들은 아합과 이세벨을 찬양하며 전향한 선지자, 이단들일 수밖에 없다. 저 그룹은 기독교를 가장하여 설치는 신천지와 섞여 뒹구는 음란의 장일 뿐이다.

지금 이 모든 사단의 중심에는 기독교가 있다. 저기 저 헌재 재판관들은 집사나 장로일 것이고 거리에서 목사가 소리치고 있다. 그 앞에서 ‘아멘’을 외치고 그들의 금송아지인 이스라엘과 미국의 국기를 흔든다. 이 모든 것들이 지옥이 따로 없다.

최소한 내 타임라인을 보는 크리스챤들은, 더이상 그따위 이야기를 하지 마시라. 죽어간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 - 제주 4.3, 광주 5.18, 6월 항쟁에 피흘린 수많은 사람들을 욕보이지 마시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완벽하진 않지만 잔인하지 않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노력할 수 있는 틀을 갖춰놓고 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약자를 섬기고 보듬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1) 나의 결론은 우리는 정치적인 발언(혹은 투표)을 열심히 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 발언 전에 나에게 있는 죄를 바라보고 회개하고 반성하며 사회적 약자를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을 고려하며 발언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절대 그 관계에 극우적인 목사의 발언이 들어올 수 없어야 한다. 목사를 포함한 타인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건강하게 흡수해야한다. 심지어 사도바울조차 여자는 잠잠하라고 하는 잘못된 사고를 ‘성경’에 까지 기록해 놓았다.

(2) 이 문제가 내게 가장 큰 이슈였다. 크리스챤으로서 차별금지법에 찬성할 수 있는가. 차별금지법의 실제 내용을 찾아보면 전혀 달라진다. 교회 목사들은 그저 누가 불러준 이슈를 교회에서 떠들 뿐 그 안에 담겨진 약자에 대한 마음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문제삼는 동성애에 대한 나의 결론은 크리스챤으로써 동성애는 죄이지만, 개인의 어려움과 마음의 공고함에 눈물흘리는 것이 먼저이고 동성애라는 죄의 무게는 내 안의 음란의 무게와 동일하다. 동성애에 대해 말하기 전에 내 안에 있는 음란을, 교회에 있는 불륜을 회개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정말 조심스럽게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