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문득 “예수님이라면 어떠셨을까"를 고민하게(종교적 용어로는 묵상) 됩니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훈련 받아왔었는데 커리어에 매달린 후로, 내 욕심에 조금 마음을 열어둔 후로 이 질문을 잘 던지지 않았었어요. 이번 질문은 요즘 출석 중인 대형 교회의 차별금지법 관련 문자를 받은 후 던지는 질문이었어요.
예수님이셨다면 이 교회에 계시지 않았겠다 싶더라구요. 제가 이해하고 있는 예수님은 교회에서 높임받는 걸 절대 좋아하시지 않으실 분이고, 수준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좋은 환담만 나누는 곳에 끼이지 않으실 분입니다. 지금 출석 중인 교회는 기독교계에서 그나마 ‘선교’, ‘봉사’ 등 행동을 중시하는 교회입니다만, 그조차도 문드러져 비싼 디저트 먹으며 노닥거리는 곳을, 예수님은 절대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작은 교회, 정말 소수의 인원이 모여서 김치와 밥을 주변 약자에게 나누는 교회, 목사님, 사모님이 본인 생계도 잘 해결 안되면서 헌금을 쪼개서 여기저기 돕는 교회, 그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는 목사님 사모님이 걱정되어 음식이라도 갖다드리는 수많은 작은 교회에 계실거예요.
제가 아는 예수님은 아마, 용산 뒷골목 쪽방촌 할머니 집에 도배를 하고 계실거고, 서울역 노숙인 옆에서 함께 앉아계실 겁니다. 결손가정 아이들을 챙기고 있을거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며 눈물 짓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진짜 크리스챤’들은 그 삶을 따라 그런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핵심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되돌아가 제 삶을 돌아봅니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살고자 몸부림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왔고 나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외치다가 어느순간 현실에 안주해서 인센티브 늘릴 법을 궁리하고 집값이 오르길 기대하는 제 모습이 오늘따라 더 창피하고 초라합니다. 가족을 부양하는 무게에 짓눌려 훌쩍 다시 그 길을 가기엔 쉽지 않은 결정인 것 같습니다. 통장 잔고의 일부를 헌금하고 후원해도 조금의 마음의 안정을 가질지언정 헌금함에 동전을 쏟아넣던 바리새인이 내 모습인 것 같아 괴롭습니다. 두 렙돈을 다 던져넣은 여인은 얼마나 마음이 가볍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을까요.
내일은 달라져야합니다. 마음의 욕심을 비워내려 발버둥칠 겁니다. 더 높은 커리어 자리로 가고자하는 욕망을 끊고 내 주변의 작은 곳을 매꾸는 사람이 되려 노력할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자기 최면으로 내 욕망을 신앙으로 포장하지 않을 겁니다. 내 방향타를 천천히 원래의 위치로, 배워왔던 위치로 돌릴 것입니다.
덧,
예수님이라면 보편적 복지정책을 엄청 좋아하셨을 거예요. 약자와 함께 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박사학위를 가진 자의 화이트칼라 노동과, 아르바이트 시급 노동자가 같은 한 달란트를 받는 것이 얼마나 성경적인가요? 울산에서 장로를 하셨던 큰아버지께서 저에게 빨갱이 사상에 물들었다며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두둔한다’며 소리치셨던 순간이 있었는데, 아마 성경의 이 원리와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해내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