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

“두 밤만 자면 할아버지네 가는거지?” 나단이가 되물었다. “그래 두 밤만 자면 가는거야.” 나는 나단이에게 두 손가락을 꼽아보며 말해주었다. 요즈음 우리의 잠자리에서의 대화는 할아버지네 가는 날수를 세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이 아이에게는 ‘가고 싶고 만나고 싶은’ 할아버지다. 나 또한 그랬다. 할아버지 댁에 갈 수 있는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고, 방학하는 당일부터 나를 데려갈 할아버지가 언제 오는지, 혹은 아빠가 날 데려다 줄 것인지 물었다. 할아버지를 사랑했다. 혼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고민하며 아빠나 엄마보다 할아버지를 마음깊이 더 사랑한다고 결론 내리던 기억이 있다. 아마 이런 질문은 초등학생쯤 되어서야 던진 질문이겠지만 그보다 더 어릴 때는 할아버지를 더 사랑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나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건 할아버지가 노쇠해가면서 더이상 나의 이야기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를 연결하던 끈이 끊어졌던 것 같은 느낌을 기억한다. 대학교를 거의 졸업할 때 즈음 되어, 나이 80에 다다른 할아버지의 먹먹해진 귀와 어두워진 눈이 나를 바라보지 못할 때 할아버지를 마음 깊이 사랑했지만 더이상 할아버지의 감정을 내 감정 깊이 담아내지 못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와의 관계와 반비례해서 나에겐 아빠의 자리가 커졌다. 아빠는 내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내가 힘들 때 품에 안겨 울 수 있는 존재였다. (여러번 진심을 다해 아빠 품에서 울었다.)

한달쯤 전 아빠가 갑자기 단기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을 겪었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놀랬고 동생은 그 다음날 제주도에서 비행기를 탔다. 나는 출장 일정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마음으로만 걱정하며 기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틀 정도 마음 다해 기도한 후 마음 속에는 남모를 평안함이 찾아왔다. 아빠의 아픈 것이 당장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물리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마음 속에서는 또다른 희망이 피어났다. 깊은 밤 중 기도할 때 옆에서 쌔근쌔근 잠든 나단이를 보노라니 아빠를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 뿐 아니라 나에겐 나단이라는 또 다른 친구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떠올리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끈이 희미해져 갈수록 아들과의 끈이 선명해져 보였다. 천국소망과 함께 우리 아빠-나-아들로 이어지는 끈은 모두에게 비극인 우리 인생의 슬픔을 이겨낼 힘을 주는 것 같았다.

내 아들도 나와 같은 감정으로 본인의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 할아버지댁에 가면서부터 두 사람은 항상 붙어다니고 아빠가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이 푸근했다. 우리는 떨어진 개별 객체이긴 하지만 뜨거운 끈으로 연결되어있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 아빠는 내 아들과 내가 할아버지와 가졌던 끈을 또한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스러져가더라도 내 아들은 나와의 그 끈을 항상 붙들고 있을 것이고 내 아들의 아들이 또 나와 그 끈을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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